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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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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철목사의 블로그(대마도선교)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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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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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Q.T】 바리새인의 기도, 세리의 기도 < 사순절 기도 묵상 < 연재 < 기사본문 - 본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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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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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9-14절

µÎ¶õ³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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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 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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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 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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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9-14
왜 바리새인은 기도하기 전이나 후나 아무런 마음에 감동도 없고 처음 나올때 그대로 성전을 빠져 나갔을까? 아마도 평생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의 예배는 진짜 예배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하나님의 감동이나 교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예배하러 나오기 전부터 의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왔고, 기도 중에도 의로운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 그는 전혀 나음이 없는 예배, 기계적인 예배, 무미건조한 예배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 받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다. 세리가 그런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왔다. 사실 그는 마음이 괴롭고 무거워서 하나님을 향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간구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짧은 기도 속에 그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그에게는 어디에서도 의로운 마음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상하고 자복하는 심정으로 가득하다. 사실 당시 사회에서 세리는 못된 사람 취급 받았다. 창기와 동일한 공인된 죄인 취급을 받는 유대 사회에서 버린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누구도 세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세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신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세리가 바로 잃어버린 자이다. 당시 로마 식민 통치 아래서 나라의 주권을 이방 로마인에게 내어 주고 선민의 자존감과 자부심이 산산히 부서져 이스라엘은 비참하였다. 그런데 이 세리는 이런 속에서도 괜찮은 직업을 있다는 것을 알고 세리가 되었다. 돈을 꽤 모아 사는 것은 남부럽지 않게 되었는데, 문제는 동족들의 따가운 멸시와 천대는 참기가 어려웠다. 이미 엎지러진 물처럼 이제 그의 삶을 되돌려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세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의지하고 믿었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거부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에서 우리는 어떤 불평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입달린 사람으로서 할말이 없겠는가? 불평 할만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긍휼함을 구하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잃어버린 자를 결코 놓침이 없이 항상 찾으신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말씀에서 첫째로 주신 복이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하여 나온 세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감동과 긍휼하심이 깊이 다가온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의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고 감동하여 새로운 힘과 소망이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예배자의 마음 깊이 감동으로 와닿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찾아 오시고 참된 위로와 평강으로 가득 채워주신다. 이것이 예배요 진정 나음을 입음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신다.
【사순절 Q.T】 바리새인의 기도, 세리의 기도
제목 : 바리새인의 기도, 세리의 기도
본문 : 누가복음 18:11~13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이방 문화에 물들어 가는 것을 배격하고 모세오경과 유대인들의 전승을 강조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그들이 유대인들의 지도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첫 출발은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권력도 생기게 되자, 그들의 경건은 변질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와 금식, 십일조 생활, 구제 등에 언제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엄격한 신앙 생활은 일반인들이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의지에서 출발한 경건도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다른 사람들의 선망을 받으며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도는 항상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나 그들 마음에는 자신들의 호칭처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특권의식도 자리 잡았습니다.
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는 표현에서 바리새인이 기도드릴 때의 마음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드리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드러나기를 원했고 특별하게 보이길 원했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기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결국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잘 봐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경건한 모습을 자랑하듯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니 저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있으니 제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기 의(義)를 내세워 기도했으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기도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낮아지게 했습니다.
기도는 자기의 의(義)를 힘입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심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리도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과 달랐습니다.
13절에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라는 표현에서 세리가 기도드릴 때의 마음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기대도 하지 않지만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결국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의지했습니다. 세리들은 몸을 구푸리고 엎드려 기도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높여주십니다.
기도는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며 나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자리에서 겸손히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입니까? 아니면 세리의 기도입니까?
<적용>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기도한 일은 있지 않나요? 하나님만 집중하며 겸손히 기도하도록 합시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날 바리새인과 같이 특권의식과 교만으로 물든 마음으로 기도한 것들을 회개합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며,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본문 연구.
누가복음 18:9~14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다. 제임스 보이스(James Boice)가 지적한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탕자의 비유”와 같이 예수님의 가장 잘 알려진 비유 가운데 하나다.1
이 비유는 두 남자의 기도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더 주된 주제는 겸손에 대한 것이다. 본문의 바로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아이에 대한 칭찬 이야기(눅 18:15~17)와 그 뒤를 잇는 예수님과 부자 관리의 대화 이야기(눅 18:18~30)도 기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2
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비유로서 당시 청중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대조적인 두 명의 사람을 등장시켜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본문의 두 등장인물은 기도를 통해 두 가지 다른 유형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결국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 즉 어떤 태도를 받으시고 축복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그 청중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히면서 시작된다. 그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절)이다. 바로 뒤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파는 주전 2세기 후반에서 주후 1세기 후반까지 팔레스타인 땅에서 활약했던 주요 유대인 그룹으로서 율법의 보호자요 해석자로 여겨졌으며 당시 유대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3 복음서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맹렬한 반대자이자 자기 의에 사로잡힌 집단으로 묘사된다. 누가가 9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들은 다른 사람들, 특별히 죄인들을 멸시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는 말로 시작된다. 바리새인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유대의 종교적·사회적 스펙트럼에서 바리새파와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었던 한 세리였다. 사람들은 세리를 “악하고 사람을 속이며 돈만 밝히는 로마의 세리”로 불렀다.4 그들은 죄인의 대명사였으며 로마를 위해 자기 백성을 배신하는 배신자로서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남의 것을 빼앗는 자, 불의한 자, 간음자,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일주일에 두 번(아마 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사실에 대해서도 감사했다. 물론 그는 이 놀라운 경건의 행위들을 실제로 했다. 그것은 그에게 종교적인 성취를 나타내는 일종의 배지와도 같았다. 그는 그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그의 기도는 시편의 찬양 시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기도는 데렐 박(Darrell Bock)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자랑하는 왜곡된 찬양 시다.5 그의 기도는 “하나님, 제가 이처럼 위대한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 하늘을 향해 손과 눈을 드는 것이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다.6 그러나 세리는 그런 일반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못할 만큼 마음이 낮아져 있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자신의 가슴을 쳤다. 가슴을 치는 것은 큰 애도나 비통의 표시로서 이 경우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나타낸 것이다.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다. 하나님께 내세울 만한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세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의 자비였다. 여기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덮어 주소서’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7 그는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한 것이다.
이 비유는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로 끝이 난다. 그분의 결론은 당시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의 겸손을 인정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기도가 응답된 자는 종교적 성취와 자신의 경건을 들먹인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비를 호소한 죄인 세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이는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겸손의 필요성에 대해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어디 있는가?
설교의 전개 방식
이 설교는 비유라는 장르를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납-연역 방식을 택했다. 간단한 서론 후 먼저 귀납적으로 본문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야기가 흥미롭게 들리도록 약간의 살을 붙였고 그런 과정에서 본문의 내용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근거한 상상력을 사용하기도 했다.8 예를 들어 바리새인이 경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성전 마당의 한 구석에 있는 세리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설교의 교훈은 본문 이야기의 설명이 끝난 다음 연역적으로 제시된다. 본 설교에서는 3개의 교훈을 나누었는데 어떻게 이런 교훈을 도출했는지를 본문과 연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 적절한 예화와 상황화(contextualization), 그리고 권면을 통해 청중에게 적용했다.
1. J. 보이스, 「예수님의 비유강해설교」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7), 114.
2. Darrell L. Boc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Luke (Grand Rapids: Zondervan, 1996), 460.
3. S. Taylor, “Pharisees”,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ed. Walter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4), 849.
4. 보이스, 앞의 책, 116.
5. Bock, 앞의 책, 461.
6.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서울: IVP, 1998), 276.
7. Bock, 앞의 책, 462.
8. 설교 시 상상의 사용을 위해서는 워렌 위어스비의 「상상이 담긴 설교」 (서울: 요단출판사, 1997)를 보라.
설교문.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로 뽑힌 어느 목사님에게 교인들은 다음의 글귀가 적힌 메달을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님께!” 그러나 교인들은 그 메달을 바로 다음 주일에 다시 빼앗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 그것을 목에 걸고 설교하러 나왔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이 겸손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여자 성도 한 분이 다가와 감사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겸손한 것 하나만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겠더라고요! 겸손이 저의 장점이에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설교를 들어봐야 자신이 겸손한지 아닌지 알겠습니까? 겸손은 말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물론 듣기 쉬운 주제도 아닙니다. 겸손과 그것의 반대인 교만은 상당히 교묘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상 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겸손을 가장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기도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교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혼자 겸손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겸손은 정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기 비하나 자신감이 결여된 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유약한 성격이나 우울한 기질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타이론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묘사도 있습니다. “겸손은 미끄러운 수박씨와 같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A. B. 브루스의 것도 좋습니다. “겸손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보이고,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겸손에 대한 정의는 앤드류 머레이의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의 완전한 고요함이다. … 겸손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내게 행해진 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겸손은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내가 멸시나 책망을 받더라도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다. … 겸손한 자는 자신에 대해 낮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겸손은 너무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J. C 라일은 “진정한 회심의 확실한 표적은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겸손하지 않고 참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정한 인식이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겸손하지 않고 구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는 그래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겸손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우리 주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십니다.
극과 극의 두 사람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두 등장인물인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합시다. 잘 알다시피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더불어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 집단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와 유전 존중을 강조했던 종교적 보수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들은 소위 ‘모세의 자리’라는 곳에 앉아 가르칠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고 그들 가운데는 구약 학자인 율법사도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은 계속 이 바리새파와 부딪치고 논쟁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신 가장 큰 것은 그들의 위선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은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바리새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세리는 그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켄 가이거의 표현처럼 “유대 사회의 신발에 묻은 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냄새나고 혐오스러운 집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의 허가 아래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쳤습니다. 안 그래도 세금을 거두는 관리를 좋아할 리 없거늘 이들은 자기 백성의 혈세를 짜내어 로마에 넘겼으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거기다 온갖 부당한 징수 방법으로 상당 부분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도둑들이었으니 오죽했을까요?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요 매국노요, 로마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니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들어보나 마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청중들에게 겸손에 대해 정말 충격적인,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남기기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본문 9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파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메가톤급 어퍼컷을 한방 제대로 먹이기 원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또 한 번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어느 기도회의 대반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에 세 번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 그리고 해질 무렵의 저녁 6시가 그때였습니다. 이때가 되면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정기 기도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물결처럼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서쪽 문을 지나 이방인의 뜰을 지나고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안쪽 마당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과 세리 하나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정기 기도 시간을 빼먹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다른 사람들이 다 바캉스를 떠나는 휴가 기간에도 기도하러 오고 자기 나라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그 순간에도 중계 방송을 보지 않고 기도하러 오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기도 시간을 빼먹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앞쪽 중앙에 자리를 잡고 일단 주위를 둘러봅니다. 죄인들이 더러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어정쩡한 자세로 구석에 서 있는 세리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비웃음이 배어 나오면서 경건한 자신과 저절로 비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국회 의원 후보 합동 연설회를 우연히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한 야당 후보가 원래 야당이었다가 여당으로 당을 옮긴 다른 후보를 향해 “변절자”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말투와 표정이 얼마나 경멸에 가득 차 있었는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표정도 그랬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으로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팔을 길게 뻗고 손바닥을 위로 편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그는 거룩한 톤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1~12절에 그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 보통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엄격한 금식을 했습니다. 포도당 주사를 맞거나 건강 보조 음료 등을 마시면서 하는 그런 금식이 아니라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 제대로 된 금식이었습니다. 십일조도 세금과 보너스 공과금까지 다 뗀 후 계산하는 방식이 아니라 율법에서 추론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다 모으면 소득의 20% 정도가 되었다)을 드렸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된 자신이 너무 대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달랐습니다. 누가는 13절에서 그가 멀찍이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마 뒤쪽 구석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감히 성전 마당을 가로질러 앞으로 갈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이 거룩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부끄러운 죄들이 양심을 때립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비겁함과 정의롭지 못한 모든 죄악들을 다 지우거나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다른 사람들이 기도할 때 흔히 하는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회의 표시로 가슴을 치며 비통한 목소리로 자비를 호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결론은 당시 청중들에게 충격 그 이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경건의 모델과도 같았던 바리새인의 모범적 기도와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모임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도덕적으로 똑바른 삶을 사는 장로님보다 생전 처음 어쩌다 교회 전도 집회에 나온 마약 장사가 더 의롭다고 하신 격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모임 출석이나 십일조가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마땅히 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도덕적으로 똑바른 삶에 문제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당연히 윤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럼 뭐가 문제였나요? 교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겸손은 많이 받은 자들일수록 갖기 힘든 덕성이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겸손이 참 힘든 덕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많이 받은 자들에 대해 부러워합니다. 때로는 왜 이렇게 하나님이 불공평하냐고 원망도 합니다. 그러나 많이 받았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들에게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특별히 많이 받은 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겸손이라는 덕목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대단한 성취를 했거나 명문 학교를 나왔거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겸손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들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스튜어트 브리스코 목사는 목사에게 내재된 직업적 위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회 초창기 시절 자신이 설교하면서 손으로 예배당 뒤쪽을 가리켰더니 모든 고개가 그쪽으로 다 돌아갔던 경우를 회상했습니다. 당시 묘한 쾌감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죠. 그는 그때 자신이 교만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조종하고 싶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관심의 집중이 되고 싶은 저급한 욕구에 휩싸일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바리새인은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엘리트 그룹이었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남들이 받지 못하는 교육을 받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특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겸손히 사람들을 섬겼어야 하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와 종교적 열정과 도덕성을 자랑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좋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학교를 나온 자, 훌륭한 직책을 가진 자, 찬양이나 가르침, 미술, 운동, 기술 등의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자, 남들보다 좀 잘 생기고 신체 조건이 더 좋은 자, 더 높은 위치에 있거나 더 부유한 자, 더 많은 영적 경험을 했거나 더 오래 교회 생활을 한 자, 유달리 도덕적이고 나름 의롭게 사는 자, 종교적 열심이 뛰어난 자,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걸리면 여러분은 많이 받은 자입니다. 그 말은 겸손하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천사 중 가장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교만하여 타락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고린도전서 4:7에서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라고 질타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자랑하지 맙시다. 더 낮아져서 섬기며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립시다. 더 받은 자들일수록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첫 번째 교훈이 경고성이라면 두 번째 교훈은 겸손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입니다. 겸손하기 위해 우리는 존경받는 유대교 교사 엘리에셀 벤 히르카누스가 임종 시 그 제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비유의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들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자, 더러운 세리를 보며 자신의 비교 우위를 확인하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면에서 세리보다 바리새인을 더 닮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기보다 좀 못한 사람과 비교하고는 우쭐해합니다. ‘흠 저 사람은 아까 밥 먹을 때 보니까 기도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나를 봐. 나는 커피랑 치즈 케이크 한 쪽 먹을 때도 5분간 기도하지!’ ‘교회 오다가 저 집사가 모는 차를 봤는데 신호 위반 세 번에 끼어들기 한 번, 거기다 속도위반은 무지막지하더구먼. 그러나 나는 신호 위반 딱 한 번밖에 안 했고 그 후에 바로 회개 기도 했어!’ 이런 식의 비교는 우리를 교만하게 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게 만듭니다. ‘저런 부도덕한 사람 같으니라고. 저런 무능한 인간을 봤나, 저런 무식한 놈 좀 보세요.’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위험할 뿐 아니라 바보 같은 짓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서로를 비교하여 자기를 자랑하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에 대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질타했습니다(고후 10:12). 왜냐하면 그들은 비교의 기준을 잘못 골랐고 참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상 주시는 이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으며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자꾸 인식한다면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겠습니까? 한때 제가 섬겼던 교회의 청년부는 축구를 참 잘했습니다. 교회끼리 붙으면 지는 적이 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그 팀이 처음으로 목동 잔디 구장에서 경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팀의 주장 선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대로 된 구장에서 경기를 하니까 일단 구장이 무지하게 크고 공을 차도 잘 안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국가 대표팀 골키퍼들이 골킥을 하는 것 보면 하프라인을 훌쩍 넘기는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는 교회 팀이라고 해도 국가 대표와는 견줄 수조차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분 앞에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쓸데없는 자랑이 나오려는 순간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기억하십시다. 낮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인정과 긍휼을 받게 한다
예수님의 오늘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에 도취되어 멋있게 기도했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인상을 받고 ‘야, 그 사람 정말 기도도 잘 하고 역시 영빨이 보통이 아니야!’라고 찬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겨워 견딜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누가 그를 눈여겨봤겠습니까? 그의 기도에 누가 관심을 기울였을까요? 욕하는 사람은 좀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뭐 저런 것까지 여기 와서 기도한다고. 나 참, 꼴값도 가지가지 떨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마당 구석진 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 사람을 향한 자비로 넘쳐흘렀고 그분의 눈은 그에 대한 인정으로 빛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사람과의 인간관계에 얽힌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덕성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감과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말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야고보서 4:6의 말씀은 가장 단도직입적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고 싶습니까? 그분의 인정과 축복을 경험하기 원하나요? 겸손하기 바랍니다.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특별히 그리 크지 않은 교회를 목회하면서 경험하는 한 가지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계속 느끼게 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우쭐거리려 하다가도, 조금 자랑하고 싶다가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입이 쑥 들어갑니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실패를 통해 교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조금씩 배워 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그리고 제 주변에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심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무엘 로간 브렝글 박사의 이야기도 그것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 브렝글은 뛰어난 미국 대학생이었고 그 해 수석 졸업생으로 대표 연설을 했습니다. 졸업에 즈음하여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를 했고 그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 머물며 계속 설교를 했지만 그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많은 불신자들과 접하며 복음을 좀 더 퍼뜨리기 원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구세군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소문이 별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유력한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런던으로 갔으며 구세군의 지도자 윌리엄 부스 밑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스는 그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20여 명의 후보생들과 함께 그를 훈련 요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열성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렝글이 처음으로 맡은 일은 산더미같이 쌓인 동료들의 진흙 구두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진흙을 털어 내면서 그의 마음에는 굉장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류 교회를 버리고 런던에 온 것이 겨우 이 일을 하기 위해서인가?’ 마귀의 음성에 거의 굴복했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주께서)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4). 그는 마귀의 교활함을 간파하고는 외쳤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수건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으실 수 있으셨다면 제가 후보생들의 더러운 구두를 못 닦을 이유가 없습니다.” 겸손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고 그의 사역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위대함으로의 하강
하나님 나라에는 많은 역전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낮추면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자기 과시와 카리스마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이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심으로 지극히 높은 이름을 얻었습니다. 빌립보서 2:6~11은 그 사실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우리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빌 하이벨스는 겸손에 대해 ‘위대함으로의 하강’이라는 멋진 표현을 썼습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낮아지십시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우리가 똑똑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원이 더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정통 교리를 신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약해지고, 더 낮아지고, 더 마음으로 겸손해질 때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리처럼 참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주께 부르짖으십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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